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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공 류여해(博士公 柳汝諧)

       (선조4년~광해군 연간, 1571~ ?)        

 


 

公은 선조 4년(1571) 선무랑 류담(宣務郞 柳潭)과 예빈별좌 정희계(禮賓別坐 鄭熙啓)의 따님인 경주정씨의 3남3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순거(舜擧)이다. 조부는 증참의 효원(孝元), 증조는 증대사헌 광조(光祖), 고조는 증이조참의 호군 완(琬)이다. 시윤공 척(寺尹公 惕)이 7代祖이다. 公의 고조 완(琬)은 장인이 의성군 채(誼城君 寀)로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손녀사위가 된다. 증조인 광조의 배위는 태종의 자 경녕군의 증손녀이다. 태종을 기준으로 보면 고조는 증손녀 사위이고 증조는 고손녀 사위이다, 고조와 증조가 대를 이어 왕실과 혼인을 맺은 것이다.

 

정민공 간은 정민공의 부친이 출계(出系=養子)한 관계로 족보상으로는 9촌 숙(叔)이지만 혈통상으로는 당숙(堂叔)이 된다. 정민공의 부친 경원은 公의 증조부 광조의 다섯째 아들로 당숙인 광훈에게 출계하였다. 따라서 정민공의 아들인 교리공 여항과 헌납공 여각 형제는 실제로는 재종 아우가 된다. 公은 24세이던 선조 27년(1594) 11월 임진왜란 중 실시된 별시에서 병과에 합격하였는데 광해조의 권신(權臣) 이이첨과 인조조(仁祖朝)에서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이 같이 합격하였다. 公은 이때 유학신분으로 사마시(司馬試)를 거치지 않았다.

 

公은 과거 합격 1년 6개월 뒤인 선조 29년(1596) 4월과 5월초에 걸쳐 중국 요동에 파견되어 중요한 외교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종9품 성균관 학유(學諭)였던 公이 맡은 임무는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우리나라가 일본과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틈을 타 북변국경을 어지럽히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을 막아달라고 요청하는 咨文(외교문서)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문제의 건주여진의 추장은 20년 뒤인 광해군 8년(1616)에 후금(後金)을 세운 누르하치이다. 건주여진이 군사를 움직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은 조선에 연병교사(練兵敎師)로 파견된 明의 유격장군 호대수(遊擊將軍 胡大受)에게 도움을 청했고 호대수는 수하(手下)의 여희원(余希元)을 건주여진에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는바 여진지역을 관할하던 요동도의 포정사 양호(布政使 楊鎬)는 호대수가 월권행위를 했다며 발끈한 것이다. 양호는 여진을 달래기 위해 여희원 편에 보낸 포백(布帛)을 조선 조정이 明을 통하지 않고 여진과 교통한 증거이므로 이를 明나라 조정에 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조선조정은 부랴부랴 양호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건주여진의 침략행위를 막아주기를 요청하는 자문을 들려 公을 파견하였으나 公은 자문 전달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 양호와 접촉하여 조선 조정의 입장을 해명하는 등 진력을 다했다. 양호가 “호유격은 군사를 훈련하는 임무만을 맡았고 건이(建夷: 건주여진)는 그가 맡은 것이 아닌데 감히 직분을 넘어선 행동을 하였으므로 上司와 본아(本衙)가 모두 온당하지 못하게 여긴다.”라고 힐난하자 公은 “우리나라의 변신(邊臣: 변방장수)이 여러 번 위급한 상황에 몰려 사세가 급박하였으므로 호유격이 편의에 따라 처치하여 그 위급을 구제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公은 당시 말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외교문서를 전달하는 소극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노력하였다고 요동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보고한 내용이 선조실록 29년 5월 22일자에 실려 있다. 재종제인 헌납공 여각은 광해군 11년(1619) 월사 이정구를 도와 조선이 후금(後金)과 연합할지 모른다는 明나라 조정의 우려를 해소하는 외교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당숙인 정민공은 진향사(進香使)로 明나라를 다녀오다 풍랑으로 배가 침몰되어 별세하여 재종제인 교리공 여항이 서장관으로 明을 다녀왔다. 明・淸이 교체되는 긴박한 대중국외교 상황 속에서 당시 외교관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된다. 公은 이처럼 미관시절(微官時節)에 이미 막중한 임무를 맡을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公의 벼슬은 정7품 성균관 박사에 머무는데 그쳤다. 이는 광해군 때 이이첨이 주도한 폐모론에 정민공이 반대해 정치적 핍박을 받았는데 公도 이러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배위는 참판 이원의 따님인 전주이씨이다. 외아들 동헌(棟憲)과 두 딸을 두어 심무(沈倵)와 이준(李晙)에게 각각 출가했다. 公의 묘소는 실전되었는데 방배동에 모셔졌던 고조 완(琬)의 묘소가 경기도 파주시 동패동 심학산으로 천장할 때 실전(失傳)된 휘여해 실향후손헌성망배제단(諱汝諧 失鄕後孫獻誠望拜祭壇)과 휘효원. 휘담. 휘여주(諱孝元, 諱潭, 諱汝舟)의 설단(設壇)을 모시고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