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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열부 고령신씨(孝烈婦 高靈申氏)

       (영조41년~순조12년(1765~1812)        

 

고령신씨지묘

(경기 파주시 동패동 술미산)

 

효열부 고령신씨는 시윤공 13대손 류현중(柳鉉重)의 배위(配位)로 영조 41년(1765) 정월 22일 고령인 신학채(申鶴采)의 따님으로 태어났다. 고령신씨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인 좌찬성 문간공 신광한(左贊成 文簡公 申光漢)의 9세 손녀이다. 신광한은 중종 5년(1510)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급제하여 151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는 우참찬으로 소윤(小尹)에 속하여 윤임(尹任) 등 대윤(大尹)의 제거에 공을 세워 위사공신 3등이 되었고 우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였으며 영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양반가의 규수로 부덕과 아름다운 용모로 주변의 평판이 높았던 고령신씨는 혼기를 맞아 3년 연상 현중의 배필이 되어 우리 가문에 들어왔다.

 

현중(鉉重)은 류규(柳圭)와 해평인 윤득언(海平人 尹得彦)의 따님인 해평윤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字는 진백(鎭伯)이다. 해평윤씨는 선조조에 좌의정을 지낸 윤두소(尹斗壽)의 후손이다. 윤두수는 명종 10년(1555)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 1558년 식년 문과 급제(式年 文科 及第), 선조 9년(1576)에 대사간, 대사성에 1589년 평안감사를 지내고 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한 공으로 광국공신 2등(光國功臣 二等)이 되고 해원군(海原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영대장,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고 1598년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탄핵을 받아 사직을 하였고 뛰어난 문장(文章)과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시호는 문청(文靖)이다. 현중(鉉重: 28世)의 부친규(父親 圭)는 26世인 만욱(萬郁)과 이진주(李震柱)의 따님인 전주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伯父)인 만택(萬擇: 26世)에게 입후(入後=養子)되어 호은공 동량(壺隱公 棟梁)의 종손(宗孫)이 되었다. 규(圭: 27世)의 생부(生父) 만욱(萬郁: 26世)은 글과 글씨를 잘해 문필과 금석문을 많이 남겼으며 양부(養父)인 만택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현중의 증조는 명진(明晉: 25世), 고조는 한익(漢翊: 24世)이다. 5대조(五代祖)가 바로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날린 호은공 동량(壺隱公 棟梁: 23世)이다.

 

고령신씨가 시집을 온지 얼마 안 되어 시아버지 규(圭)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에 고령신씨는 시아버지의 곁을 항시 떠나지 않고 수발을 들며 시아버지의 손발이 되었다. 고령신씨의 이 같은 지극 정성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시아버지는 자리에 누운 지 10여년 만인 어느 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보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에 앞서 고령신씨는 한 노인이 탕재가 든 병을 건네는 꿈을 꾸었다고 전한다. 고향인 교하(交河)를 떠나 강원 양구(江原 楊口)에서 살던 고령신씨 일가는 정조 15년(1791) 9월 9일 집안의 기둥인 현중이 30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큰 시련을 맞게 되었다. 당시 아들 태로(台魯)는 3살이었으며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67세의 시아버지는 보행이 가능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수발이 필요한 상태였다.

 

27세로 청상(靑孀)이 된 고령신씨는 이 같은 시련을 극복하고 집안을 이끌어 나가는 한편 병든 시아버지가 3년 뒤 타계할 때까지 친 피붙이도 감히 하지 못할 궂은 뒤치다꺼리를 해가며 시아버지의 병구완과 수발을 계속했다. 시아버지가 타계한 뒤 고령신씨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고향에서 반 천리(半 千里)가 떨어진 객지의 고혼(孤魂)이 되게 할 수 없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수(刺繡)를 놓아 돈을 모았다. 수년 뒤 어느 정도 돈이 모아지자 고령신씨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유해를 좋은 관곽(棺槨)에 모시고 고향인 교하의 선영으로 천묘(遷墓)한 뒤 석관(곶)면(石串面: 지금의 동패리)에서 살았다.

 

고령신씨의 이 같은 효행은 향리(鄕里)의 유림(儒林)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이들의 강력한 천거에 따라 교하군수가 예조(禮曹)에 고령신씨를 효열인(孝烈人)으로 추천하게 되었다. 교하군수의 추천은 순조 1년(1803), 순조 3년(1806), 순조 6년(1809)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교하군수의 예조에 보낸 추천서가 현재 남아 있는데 84명이 연명(連名)하였다. 이를 통해 고령신씨의 효행에 교하의 유림들이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령신씨는 48세 생신을 지낸 10일 뒤인 순조 12년(1812) 정월 30일 타계하였다. 유택(幽宅)은 교하 주산 선영(酒山 先塋)의 부군 묘(夫君 墓)에 합장(合葬)으로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