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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융사공 류상량(摠戎使公 柳相亮)

        (영조30년~ ?, 1764~ 1834년 이후)

 

총융사공 휘 상량 애민선정비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선정비 및 승도절목 터)

선정비군 및 승도절목 안내문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공은 영조 30년(1764) 증호조판서 류복원(柳復源)과 군수 이기상(李麒祥)의 따님인 연안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숙인 증병조판서 무숙공 류효원(武肅公 柳孝源)에게 출계됐다. 자는 경룡(景龍)이다. 무숙공 효원의신도비에 따르면 효원을 특별히 아꼈던 정조가 효원의 후사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을 무숙공의 양자로 들이라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무숙공 효원의 양자가 되었다. 고조는 증호조판서 운장, 증조는 증좌참찬 세기, 조부는 통제사공 진항이다. 공은 정조11년(1787)에 무과에 합격한 이후 43세가 되던 순조6년(1806) 전라좌수사에 순조 8년(1808) 경상우병사, 순조 10년(1810) 경기수사 겸 삼도통어사에 순조 11년(1811) 함경남도 병사(남병사)로 임명되어 서북변의 5개진을 혁파하는 등 방비태세의 근본적 정비를 단행했다. 순조 18년(1818) 9월 내직인 좌포도대장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다시 외직인 황해병사로 나가 순조 22년(1822)에 평안병사로, 순조 24년(1824) 내직인 우포도대장에 순조 25년(1825) 금위대장에 임명되었다.

 

공이 금위대장으로 임명되던 시기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의 외척인 풍양조씨와 순조의 외척인 안동김씨가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 청정하던 영조비 정순왕후의 후원 아래 득세한 노론 벽파를 축출한 후 안동김씨가 정국 주도권을 잡고 군사정책의 실권을 가진 비변사를 중심으로 운영하던 시기였다. 공은 금위대장과 우포도대장을 겸임하다가 순조 27년(1827)에 도성의 야금이 해이해진데 대한 책임을 물어 파직되었다가 한 달이 못되어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 순조 30년(1830) 8월 전라도 용담현(龍潭縣: 현 전라북도 진안군)으로 유배되었는데 공은 탄핵을 받게 되자 어영대장 직책을 내놓았다. 순조가 거듭 만류하였으나 사임의사를 꺾지 않았으며 도성 밖으로 나가기까지의 공의 처신에 순조는 “이와 같이 교만한 행동은 옛날에도 듣지 못하였다‘ 며 유배를 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해 8월 부사과 윤상도가 공을 탐관오리라고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오히려 윤상도를 추자도에 유배하고 공의 유배를 해제했다. 순조 31년(1831)에 공은 총융사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지훈련과 좌우포도대장을 겸임하였다.

 

순조 32년(1832) 6월 총융청 관할구역인 북한산성에 폭우가 내려 행궁과 사찰, 민가 45채가 유실되고 30명의 주민이 사망하는 큰 수해가 발생했다. 공은 피해 재건에 나서 순조 33년(1833) 4월에 이를 모두 마쳤는데 재건과정에서 보여준 공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정2품으로 품계가 올랐다. 북한산성 홍수피해를 복구하여 품계가 올랐던 이해 9월 공은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12월 실록에 총융사의 자격으로 금군의 입직 인원수를 조정하는 논의에 참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총융사 직책은 여전히 겸임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실록에 공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지 않으며 족보에도 몰년이 나와 있지 않다.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을 당시 공의 나이가 70세였던 것에 미루어 얼마 뒤 은퇴하고 타계한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중성을 거쳐 대남문 쪽 오른 길목에 위치한 총융사 선정비 및 북한산 승도절목(僧徒節目) 터에 공의 선정비(善政碑)가 남아 있다. 선정비의 표제(表題)는 ‘애민선정(愛民善政)‘. ’청덕선정(淸德善政)‘. ’영세불망(永世不忘)‘ 등으로 구분되는데 공의 비의 표제는 ’애민선정(愛民善政)‘ 으로 도광(道光) 12년, 즉 순조 32년(1832) 9월에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의 선정비는 길가에 면해 있고 길목의 앞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공은 무숙공과 지사공 묘소의 석의와 신도비를 세웠으며 훼손된 충경공 신도비를 개수(改竪)하고 순조 29년(1829) 기축보를 간행하는데 자금을 마련하여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공의 배위는 병사 김정우의 따님인 안동김씨, 후배위는 이병원의 따님인 광주이씨, 3배위는 이우정의 따님인 전주이씨, 4배위는 박영원의 따님인 반남박씨인데 자녀를 두지 못하여 진양군 효걸의 후손인 족제 상채의 아들 익로를 양자로 들였으며 공은 진양군 효걸의 형인 금사공 충걸의 후손이다.

 

익로는 순조조(純祖朝)에 무과에 합격하여 함종부사를 지냈다. 공의 묘소는 실전으로 인하여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대교리(공주 해동)에 설단으로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 「헌종실록」, 「진주류씨 기축보(1829)」